과정과 꿈 그리고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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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재주니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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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나의 성장기:
나는 1986년 11월 9일 부산에서 태어났다.태어나서 부모님들이 영동에서 사역을 시작하셨기 때문에 영동에서 유아기를 보냈다
그 이후로 이사를 참 많이 했다.아무래도 아버지가 사역자이다보니 주기적으로 옮겨야 하기에 영동-구미-대구-부산등 여러곳에서 나그네 같은 생활을 해야했다.세상에서 사는게 나그네의 삶이라고는 하지만 어린아이가 무엇을 알겠는가?
어쨋든 어린시절 나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던것 같다.아무래도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낳은 첫번째 아이였기 때문에 많은 친척들이나,아버지 어머니의 지인들,그리고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나를 아무 이유,조건,댓가 없이 사랑해주셨던 것 같다.그런 사랑이 나를 그래도 지금까지 살게 해주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부산에서 초등학교 5학년부터 고등학교까지 거의 8년정도의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그 사이에 엄청난 변화의 물결이 일줄 상상도 못했으니..부산 구포제일교회에서 아버지가 부목사를 사임하시고 이제 단순한 사역자의 아들이 아닌 교회를 대표하는 담임목사의 아들로 그것도 첫째라는 막중한 부담감을 짊어져야 하는것이 얼마나 부담인지 참 힘든 시간이었다.
아버지는 사역에 집중한다고 가정을 돌볼 여유가 없었고 어머니도 마찬가지로 우리보다는 교인들을 먼저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무언가를 많이 해야 되는 상황들에 몰려던 것 같다.어쩌면 그때부터 소위 말하는 사춘기가 시작되었던 같다.그리고 아버지의 사역이 잘 안풀리기 시작할때부터 그 사춘기는 더 심해졌던 것 같다.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심해졌고,아이들하고 말도 하지 않게 되고,교회에서도 사람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서 나는 점점 지쳐가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그리고 집안분위기도 묘해졌다
점점 집안 분위기가 악화될 무렵 아버지는 금식기도 40일을 하고 내려오시더니 뜬금없이 중국선교사라는 사명을 택하셨고 결국 교회를 사임하시게 되셨다.그렇다고 그 갈등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문제는 내가 그 당시 고3이었는데 부곡동에서 임시로 머물러 있던 집에서 나오고 어머니와 같이 외갓집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래도 한국에서 졸업을 하고 들어오는게 맞지 않나라는 생각에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수시합격으로 동명대학교 스포츠 경영학과를 들어가게 되었다.그때나 지금 생각해봤을때 내가 대학을 들어간게 신기하다고 느낄 정도로 나는 많은 것들을 놓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수시합격후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중국 가족들이 있는 집에도 다녀오고 나름대로 그나마 혼란스러웠던 시기를 벗어나서 무언가를 다시 해보려고 하던 찰나에 군대라는 벽이 나를 가로막았다.어쨋든 군대는 다녀오기는 해야 되는데 나는 솔직히 그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군대에서 생활하는 것 보다 2년 가까운 시간을 낭비해야 된다라는 현실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오죽했으면 눈물 없다고 생각하던 아버지가 내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돌아갈때 나를 안으시면서 엉엉 우셨던 기억이 난다.물론 엄마는 가기 전부터 눈물을 보이셨지만..
어쩔수 없이 군대를 가게 되었는데 그 곳이 전군에서 가장 힘들다고 소문난 이기자 부대일줄은 상상도 못했다.훈련도 많고 사고도 많고 많은 사람들이 가장 껴려한다는 이기자 부대에서의 1년 11개월의 생활은 정말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기만 하다.그래도 무사히 큰 사고 없이 사람들과 잘 지내면서 지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군대 제대이후 학교를 다니면서 나는 또 다른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내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잘 가고 있는 것일까,졸업하고 취직이 가능할까등 고민에 빠져 있을때 무심코 들었던 중국어 수업에 교수님이 중국어 잘 하면 미래 전망이 있다라는 이야기에 나는 그 학기를 마치고 중국 유학을 가게 되었다.
중국유학 생활은 한국에서의 생활보다는 확실히 편하기는 했다.수업도 일찍 마치고,공부 하는 시간외에는 대부분 거의 자유로운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새로운 것들을 경험할수 있는 기회들이 많이 주어진 것이다.중국 여자친구도 사귀어 보고 잘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공부도 하면서 나는 내 나름대로 좋은 경험을 하였던 것 같다.물론 여자친구와 결혼까지 생각했지만 헤어지면서 그 충격이 크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방황했을때보다는 휠씬 나은 것이었다.
그리고 졸업을 앞두고 있을 무렵 아는 지인분이 한국에 회사를 소개해주시면서 나는 한국에 다시 들어왓다.졸업식에 참석을 안 하면서까지 그 만큼 취업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물론 중국에서 더 이상 내가 할수 있는게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는 그때부터 좋든 싫든 한국을 가야만 하는 상황이었기에..
한국에서 첫 직장생활을 했던 곳은 구미에 있는주광정밀이라는 곳이었는데 페이는 나쁘지 않았지만 쉬는 날이 없었기에 참 고달픈 생활이었다.생전 안마시든 술도 자주 마시면서 몸은 망가지고 일요일도 일했기에 교회도 못가는 생활들이 계속되면서 나는 결국 1년 6개월만에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고 그 이후로 충북 옥천에 있는 부양소재도 다녔지만 저임금과 개인사정으로 인해 1년도 안되는 시간에 다시 그만두고 그 이후로 전전긍긍하던중에 부모님을 통해 경상남도 마산에 사랑샘 공동체목사님이신 강성기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다.
참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래도 여태까지 하나님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여기까지 인도하셨는데 어떻게 인도하실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언가 나를 향한 생각이 있고 계획이 있고 믿음이 있으시기에 누군가를 만나게 하지 않으셨라는 생각이 든다.그리고 자립이라는 거대한 벽이 나에게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
2.나의 비전:
나는 원래 욕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많은 사람들이 대기업에 다니면서 높은 지위를 얻어서 많은 돈을 벌고,명예를 얻고,사람들에게 알려지는 유명인도 되고,사회와 국가 그리고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꿈은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다.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이나 특기를 살려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나를 믿어주고 아껴주고 이해줄수있고 사랑해 줄수 있는 사람과 함께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 그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꿈이다.또한 많은 사람들과 아웅다웅하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같은 곳을 바라면서 같이 걸어갈수있는 친구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행복하게 살고 가치가 있으며 사람 살리는 일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사랑샘 목사님과 많은 대화를 하면서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성경 말씀처럼 이 혼란하고 어지러운 시대에 내가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살리는 일을 할수 있다면 돈으로 환산활수 없는 보람된 일을 힘들지만 하는게 내가 가야될 방향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결국에는 사람만이 인류의 가장 가치있는 재산이고 미래이니까..
3.사랑샘 교회를 통한 나의 기대:
사랑샘이라는 곳을 알게 된지 2주가 되었다. 아니 아직도 알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알아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것은 선교라는 것이 굳이 해외를 나간다고 해서 선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국내에서도 할수 있는 선교들이 많은데 굳이 해외를 가야지만이 선교한다라고 생각하는 발상은 좀 진지하게 생각해 볼 문제이다.나라안에서도 굶주리고,병들고,가난하고,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들을 올바른 길로,좋은 길로,낮은 길로,그리고 회복되는 길로 인도하는 것이 이 시대에 진정 필요한 일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내가 교회가 재미를 추구하는 곳이냐?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곳이냐?라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을때 나는 교회는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곳이다라고 이야기 한적이 있다.사람샘 교회가 바로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곳에서 내가 할수 있는 일이 있고 내 나름대로 보탬이 되고 사랑샘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이 사람샘 교회를 통해서 내가 할수있는 기대들을 충분히 채우고 남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을 가져본다.하나님이 어떤식으로 나를 사용하실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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