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요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릴 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 간들 잊으리요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 가서 한데 얼려 옛날같이 살고 지고 내 마음 색동 옷 입혀 웃고웃고 지내고자 그 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
이 노래 ‘가고파’는 나의 애창곡이다. 함양에서 마산 넘어올 때 저 많은 물이 모여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아버지께 놀라서 물었던 그 바다다. 노산 이은상 선생이 시(詩)를 짓고, 김동진 선생이 작곡(作曲)을 하여 나 뿐 아니라 우리국민 모두의 애창곡이 되어 널리 부르고 있다.
나는 바다로 인하여 두 번을 죽을 번 해서, 웬만하면 배를 잘 타지 않고 수영을 하지 않는다. 아니, 강물에서 헤엄은 쳤어도 수영은 배우면 하겠지만 아예 안 한다. 하지만 시간만 나면 나 혼자 바닷가 바위에 앉아 내 고향 남쪽바다를 부른다. 가고파의 가사는 분명 고향 떠난 나그네의 외로움과 그리움의 노래인데, 그 바닷가에 서서도 저절로저절로 부른다. 내가 태어난 고향의 나무 밑에 앉아서도, 고독과 손잡고 낙엽을 밟다가도 흥얼흥얼 부르는 것이 ‘가고파’ 다.
노산 이은상선생의 생가는 북마산 구, 태양극장 자리인데 도로 건너 바로 앞이 시부모님이 살았던 집이다. 그리고 나는 태양극장 뒤편에서 피아노 레슨을 했다. 하기에 동리 사람들이나 태양극장 김창주 대표로부터 이은상 선생의 생가라는 말을 들었다. 그들은 무척이나 이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북마산을 떠난 온지 몇 십 년이 넘어서 보통 차를 타고 갈 때나 지나올 적에 건성으로 보았는데, 며칠 전에 이 글을 쓰기 위하여 그 곳을 직접 가 보았더니 모든 것이 변하였다. 태양극장은 리모델링을 한 원룸으로 변경되어 있고, 다만 눈에 잘 뜨이지 않게 덮어둔 동판과 그 아래쪽으로 옮겨놓은 은상이 샘만이 생가의 자리라고 짐작케 하고 있었다. 하나님도 자기를 믿고 찬양하는 사람을 더 사랑하고, 귀신도 마찬가지인데, 내가 그렇게 애창하는 ‘가고파’ 도 어찌 나를 좋아하지 않으리!
▲ 마산교도소 총회를 마치고
내 나이 50세에 마산교도소(현. 창원교도소)의 종교. 교화위원으로 위임장을 받고 봉사를 했는데, 물론 음악지도는 당연이겠지만, 정신교육 강의를 오래 하였다. 대강당에 남자 재소자 100여명을 앉혀놓고 강의를 하다가 아무리 신경 써서 조심을 하여도 그들로 하여금 귀에 거슬리는 말이 나올 때가 있다. 표정을 보면 단번에 느낀다. 앗차! 내가 말실수를? 그런데 이 순간을 잘 도와주는 ‘오, 나의 애창곡 가고파여!’ 내 고향 남쪽바다를 부르기 시작하면 조용하다. 고개를 숙이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어떤 노래도 때와 장소와 분위기에 따라 감정이 달라지는 것 아닌가. 사실 나도 교도소 강의 때 ‘가고파’를 부르면 가슴이 아프고 시리며 눈물 섞인 소리가 난다.
1999년 5월 14일 김대중 대통령 때였다. 김 대통령이 영호남 동서화합을 위하여 청와대 초청을 하였다. 마산과 목포의 예술인 150명이 함께 청와대에 모였다. 그때 초청을 한 대통령은 갑자기 경북초도 순시로 참석을 못하고 차범석 문예진흥원장. 이명복 문화예술총연합회장. 이경림 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부회장 등 예술계 인사와 두 지역 예총 지도부 등이 참석했다. 김유배 복지노동수석이 환영인사를 하고 난 후 어떤 분이 나와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는구나’ 라는 말을 해서 좀 썰렁 했지만, 즉시 분위기를 바꾸어 시와 노래로 화합을 했다.
▲ 청와대에 모인 마산과 목포의 예술인들
▲ 마산예총 회원들
당시 이영환 마산 예총회장이 조용히 우리들 곁을 다니며 누구든지 ‘가고파’ 부를 사람 없느냐고 걱정을 하여, 이 용감한 내가 부를 줄 안다고 했더니, 농담인지 걱정인지 "할매가 가사가 긴데 다 외우겠습니까?"하여 "나도 모릅니다. 설마 그렇게도 많이 불렀는데 불러봐야 알지요" 했다. 나는 나가서 분명히 말 했다. 저희 마산성악가들이 오늘 참석을 못하여 피아노 분과 회원인 제가 부르겠는데 아마추어 가수이니 알아서 들어주시라고.
청와대서 또 목포예술인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니 감정이 또 다르다. 이건 막중한 사명을 띤 노래다. 나는 은빛 반짝이는 마산바다를, 맑은 바닷물 속을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와 바다 위를 날개 치며 날아다니는 갈매기들을 그림 그리며 불렀다. 끝나고 나니 박수를 치며 앵콜을 하였다. 사회자가 마산은 아마추어가 저 정도면 프로는 얼마나 잘 하겠느냐고 비행기를 태워서 한곡 더 부르면 떨어질까봐 얼른 들어 왔다.
▲ 청와대서 가고파 열창
▲ 앞줄 왼쪽부터 이승희, 이필이, 정영숙, 주영라. 뒷줄 왼쪽부터 조순자, 변경희.
회갑기념으로 크리스찬 문인협회 회원들과 중국여행을 갔다. 명승지 여러 곳을 관광도 했지만 그 중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곳은 ‘용경협곡’ 이다. 그야말로 협곡인데 경치의 아름다움은 설명치 않겠다. 깊고, 푸른 강물을 배를 타고 30분을 유람을 하면서 산꼭대기의 암자와 높다란 줄 위의 서커스 장면 등 볼거리가 많았다. 그날은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거쳤다 햇볕이 쨍 낫다.
우리 일행은 아무도 우산을 가지고 오지 않고 비를 맞으며 한 바퀴 돌고 있었는데 문인(文人)중 한분이 “정선생 ‘가고파’ 한곡 부르세요”라고 큰 소리로 말하여 아름다운 경치에 도취된 내가 가만있자니 간질간질하여 팔을 높이 들고 환성을 지르며 노래를 불렀다. 몇 곡을 불렀다. 끝난 후에 중국인 청년이 얼른 자기 우산을 주며 가져가시라고 하면서 ‘그 물새 그 동무들’ 멜로디를 금 새 부른다. 와- 그 청년 성악가인가?
▲ 용경협곡에서 가고파 열창
작년에 내가 섬기는 마산성막교회 <선한사마리아 선교회> 임원들이 초대 김덕주 회장의 미국 영구이민 송별차 위로여행을 갔다. 통영 이순신 공원으로. 김덕주 회장은 마산서 태어나 80년 가까이 살았다. 그러니 남다른 정이 더 했으리라. 한발자국 걸으면서도 내 고향 남쪽 바다를 부른다. 나이 들고, 병들고, 돈 못 벌으니 가기 싫어도 딸을 따라 미국으로 가야만 하니 가기 싫어서다. 우리들도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통영 바다를 바라보며 ‘가고파’를 열창을 했다. 페이스북을 통하여 큰 딸에게 엄마 안부를 물으니 매일 마산을 그리워한다고 한다.
▲ 산 위에서도 가고파
▲ 바다를 바라보면서도 가고파
▲ 선한사마리아선교회 임원들. 가운데가 초대회장 김덕주
▲ 어머니를 모시러 온 초대회장 김덕주의 딸 김미나(가운데)와 함께
‘가고파’ 노래와 관련된 이야기는 많다. 어느 나라나, 지역이나, 강이나 바다나, 사람 사는 곳 어디든지 <시와 음악>이 있으면 유명해 진다. 우리 마산도 이은상선생의 시가 마산을 빛내고 전국의 바다를 빛내어 주고 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은 친일행적으로 인하여 그분의 기념관을 세울 수 없는 일이다. 시인인 이은상. 작곡가인 조두남 선생이 친일을 했으면 얼마까지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