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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영숙
작성일11-1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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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은 실력에 따라 받는 거 아닙니까?” 목소리는 칼칼하고 눈빛은 반짝반짝 살아 있다. 그런데 일흔이 넘었단다. 오는 12일 마산에서 열리는 한국의 얼 전국음악경연대회 명예대회장 정영숙(71)씨. 정씨는 지난 40여년을 실력에 따라 정정당당하게 상을 받아갈 수 있는, ‘바른 콩쿠르’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해 왔다. 정 회장은 1941년 함양에서 태어나 마산에서 자랐다. 제일여중을 다니던 시절부터 피아노에 눈을 떴고 조용찬, 마두원, 벤박. 서인진. 비엔나 국립음대 와그너 알츠(Wagner Artzt) 교수를 사사했다. 즉, 명실상부한 창원마산지역 피아노 1세대다. 20세부터 피아노 레슨을 하다가 부산시립교향악단 초대 단원이었던 오빠의 권유로 부산으로 옮겨서, 24살까지 부산시립교향단 반주자와 피아노레슨을 했으며, 결혼 후 62세까지 마산에 정착해 피아노 교습을 했다. 1971년에는 피아노 교사들을 모아 한국음악지도협회를 만들었다. 이때 교류했던 사람이 조두남 선생이었다. “선생님께선 제게 용기를 많이 주셨습니다. 저를 딸이라고 할 정도로 가까웠지요.” 유능한 피아노 선생으로 이름을 한창 날리고 있던 때, 정 회장 삶에 일대의 사건이 발생한다. “부산의 한 피아노콩쿠르에 심사위원으로 위촉받았죠. 심사 끝내고 호텔에서 쉬고 있는데 주최자가 심사카드를 들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주최자는 정 회장에게 한 학생의 점수를 높여 달라고 부탁했다. 일언지하에 거절한 정 회장은 그날 밤 가방을 싸 집으로 와 버렸다. “제 등 뒤에다 대고 ‘다 먹고 살자 하는 건데 뭘 그리 깐깐하게 구느냐’고 하더군요.” 다음 날부터 정 회장의 도전과 응전의 역사가 시작됐다. 부모의 기대, 잘못된 심사방식, 돈과 힘의 논리가 딱딱 아귀를 맞춘 오염된 관행이 끼어들 틈이 없는, 깨끗한 대회를 직접 만들자고 다짐했다. 대회 지정곡도 직접 정했다. “피아노가 서양악기이긴 하지만 한국의 흥이 녹아든 곡을 학생들에게 보급하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대회명도 ‘한국의 얼’이라고 지었죠.” 부산의 작곡가 김국진 선생을 찾아가 ‘한국적 피아노곡’을 부탁했다. 대회참가비조차 받지 않아 심사위원들에게 심사비도 줄 수가 없었다. “차비로 만원 드렸습니다. 하지만 제 뜻을 이해해주시는 많은 교수님들이 싫은 소리 한번 안하시고 오시곤 했죠. 정말 감사했습니다.” 개개인 심사카드에 상세한 심사평을 써 참가자들이 보는 앞에서 벽에 게시하는 획기적 방법으로 심사과정을 투명하게 만들었다. 해를 거듭해가며 한국의 얼 콩쿠르는 공정한 대회라는 신망을 얻기 시작했다. 일찍 핀 꽃은 된서리를 맞는 법. 전방위에 걸친 방해공작이 만만치 않았다. 그 모진 시절 다 지나고 어언 대회 개최 40년 세월. 정 회장의 노력 덕에 70·80년대 한국의 얼 콩쿠르는 개천예술제, 진해군항제와 함께 경남지역 3대 콩쿠르에 이름을 올렸다. 콩쿠르를 거쳐간 수많은 학생들이 음악계 전반에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경선 서울음대 교수가 대표적이다. 정 회장은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 말한다. “올바른 생각을 실천했을 뿐입니다. 우리의 흥이 깃든, 정정당당하게 실력을 겨루는 ‘바른 콩쿠르’를 만드는 것 말입니다.” 김유경기자 bora@kn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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