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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위로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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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우생
작성일11-07-23 00:00 조회1,1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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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위로의 하나님


(고후 1:1-4)




  가장 위대한 목사 중 한 사람으로서 큰 회중을 인도하였고, 자신의 저서가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였던 존 헨리 조웨트John Henry Jowett 박사는 아래와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생각하기를 나에게는 삶의 기복이 전혀 없고 끊임없는 기쁨과 영적인 높은 수준에 머물러 있으리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못합니다. 나는 종종 완전히 비참해지고 모든 것이 가장 어두워 보일 때가 있곤 합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쓰시고 참으로 훌륭한 그리스도인에게서 이런 고백을 듣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설교의 왕자라고 불리웠고, 런던 태버너클침례교회의 목사였던 찰스 스펄전C. H. Spurgeon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영적으로 낙망할 때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내가 간 그 비참한 곳에는 아무도 이르기를 원치 아니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 1:8-9a에서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라고 고백을 합니다. 사도 바울의 인격은 훌륭하였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하여 그리스도를 열정적으로 따랐던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그의 사역도 훌륭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서신에서 “내가 낙망하지 아니하노니”라는 말을 자주 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바울 자신도 낙망할 수 있는 여건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고후 1:8-9을 보면 그가 얼마나 힘든 지경에 까지 이르렀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아무리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들도 우리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가 받았던 시험과 우리가 겪었던 낙망의 터널을 저들 또한 지나갔습니다.


  고린도후서에서 열쇠가 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위로’라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격려’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성경 원문에서는 이 단어가 명사형 ‘파라클레시스’, 동사형 ‘파라클레오’로 되어있는데 이 말은 ‘도움을 주기 위해서 옆에 있도록 부름을 받았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고린도후서 전체에서 명사형으로 11번, 동사형으로 18번 사용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려운 역경과 많은 시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격려와 위로가 가득 찬 편지를 쓸 수 있었습니다.


  심한 고생을 겪었고, 시련을 당하며, 삶의 압력을 받으면서도 그가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은 한마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낙심될 때, 그만두고 싶을 때, 자신의 주위 환경과 여건이 압박하고 소망이 없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후 1:9b에서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아시아에서 ‘이제 내가 죽었구나!’하는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어떻게 위로와 격려를 하나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었는지, 어떻게 낙망의 늪 속에 빠지지 않고 일어나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가를 사도바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후 1:3에서 그는 ‘찬송하리로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처한 환경으로는 기쁘고 즐거워서 노래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찬양하며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환경을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기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할 때 낙망의 늪 속에 빠지지 않고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용기를 잃고 낙망 중에 있을 때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중요한 비결은 ‘찬양’입니다.


  ‘기도가 사물을 변화 시킨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저는 오늘 ‘찬양이 사물을 변화 시킨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찬양할 때 사물이 변화됩니다.




І. 그 분이 하나님이시므로 그 분을 찬양하라!




A. 과거의 축복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사도 바울은 엡 1:3에서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한자가 되었기 때문에,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축복은 어떤 축복입니까? 죄 사함을 받으며,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후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기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비록 좋은 여건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축복하셨기 때문에 바울은 에베소서를 쓸 때 찬송하고 있습니다.




B. 미래의 축복과 산 소망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베드로는 벧전 1:3에서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라고 고백합니다. 사도베드로는 미래의 축복과 산 소망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 편지는 믿음 때문에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 등에 흩어져 어려움을 당하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졌습니다. ‘산 소망, 미래가 있으므로 주님을 찬양합시다!’라는 이 메시지가 그들에게 감동을 주었을 것입니다. 불멸하는 미래의 기업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환난과 시련이 닥칠지라도 그것들이 그들의 믿음이 진실함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기뻐하고 찬송한다는 사실입니다.




C. 현재의 축복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바울은 고후 1:3에서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환난과 시련 가운데서도 지금 역사하시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현재의 축복을 말합니다. 롬 8:26에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에 비록 환난과 시련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이루어 가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 어려움 가운데 우리로 하여금 주 예수그리스도를 닮게 하시는 놀라운 축복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찬송하리로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지순례 때 다윗의 묘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다윗의 뼈가 묻힌 곳은 아닐 것입니다. 다윗을 기념하는 묘라고 생각해도 될 것입니다. 이 다윗의 묘에 들어가려면 남자들은 겸손과 존경의 표시로 머리에 모자와 같은 것을 꼭 써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송축하는 왕이었습니다. 다윗은 찬양하는 왕이었습니다. 시편을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찬송을 하였습니까? 그는 성전을 건축하기 원했습니다. 성전을 짓기 위해 백성들이 성심으로 즐거이 드릴 때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하여 가로되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대상 29:10-13)




  독일의 린카르트Martin Rinkart 목사는 하루에 무려 40명의 장례를 집례 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사역에서 4천명의 장례를 집례했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 독일에는 구교와 신교의 지긋지긋한 30년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 환란의 기간이 끝났을 때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그때 묵상하며 지은 찬송가 20장은 대상 29:13을 근거로 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다 감사드리세 온 맘을 주께 바쳐


그 섭리 놀라워 온 세상 기뻐하네


예부터 주신 복 한없는 그 사랑


선물로 주시네 이제와 영원히




  하나님이 쓰시는 위대한 사람, 환란과 시련의 어두운 그림자가 내릴 때 일어설 수 있고 승리할 수 있던 사람들, 낙망의 늪에 빠지지 않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찬양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Ⅱ. 하나님은 자비의 아버지이시므로 찬양하라!




  유대인들에게는 아버지라고 할 때 ‘기원자, 창시자’라는 뜻을 지닙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요8:44’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마귀는 ‘거짓의 창시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자비의 아버지이십니다. 모든 자비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이 자비는 하나님으로부터만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 때문에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은혜로 우리가 받을 수 없는 것을 받게 하시며, 하나님의 자비로 우리가 받아야 할 것은 받지 않게 하십니다. 우리는 죄 용서를 받을 수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죄 사함을 받았고, 우리는 심판을 받아 지옥에 가야 마땅하지만 하나님의 자비 때문에 심판을 받지 않고 지옥가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애 3:22에서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될 수 있었습니다. 느 9:19에서 보면 “주께서는 연하여 긍휼을 베푸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주께서는 여러 가지의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버림받지 않고 구름과 불기둥으로 보호를 받았습니다. 환난과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무궁하신 긍휼, 연하여 베푸시는 긍휼, 크신 긍휼을 생각할 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Ⅲ. 하나님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므로 찬양하라!




  고후 1:3에서 ‘위로’는 단순히 동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더 약하게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강하게 하는 격려입니다.


  보혜사 성령이라고 할 때 ‘보혜사’‘위로자, 격려자’라는 뜻입니다. 바울을 세우고, 마가를 세웠던 바나바처럼 격려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곁에 서서 우리를 격려하시고 위로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말씀으로, 성령을 통해서,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격려하십니다.


  시내산은 완전한 돌산입니다. 2200m가 넘는 산인데 1500m지점에 모텔이 있습니다. 캄캄한 새벽에 일어나 얼마간은 낙타를 타고 올라가고 또 얼마간은 돌계단을 걸어서 올라갔습니다. 낙타를 타고 올라갈 때 밑을 바라보지 말고 고개를 들어 별을 바라보라고 가이드가 말했습니다. 나중에 보니 낙타가 지나는 길 밑은 뭐가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 낭떠러지 같은 길이었습니다. 위를 보며 찬양하고 기도하며 올라갔습니다. 정상에 올라가서 새벽에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하고 내려왔습니다.


  어렵고 낙심되는 절망의 상황에서도 위를 바라보기 때문에 찬양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환경으로 낙심될 때 자기 자신, 자기 감정, 그리고 주위에 있는 문제에 초점을 두기 쉬우나 위를 바라보며 믿음으로 주를 바라볼 때 찬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그분이 하나님 되시기 때문에 찬양합시다. 그분이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찬양합시다. 그분이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찬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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