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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고 박춘회 할머니와의 지난날을 추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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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1-03-01 00:00 조회74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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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고 박춘회 할머니와의 지난날을 추억하며

<첫 번째글>

우리 외할머니께서는 생선을 참 좋아 하셨다. 그래서 하루에 한번 정도는 식사 때 새끼조기나 고등어 또는 칼치를 드셨다. 지난 날을 떠올리면 할머니께서는 식사 외에 군것질도 거의 안하셨다. 밀가루 음식도 좋아 하시지 않으셨다. 예전에 아주 어렵고 힘들때 밀가루 풀죽을 너무 많이 드셔서 그런지, 늘 식사는 보리와 쌀, 곡물을 조합해서 밥을 지어드셨다. 지금 생각하면 건강식을 드셨다. 당시 쌀밥이 최고였는데...,

그리고 내가 기억하기로는 우리 외할머니께서는 젊었을때나 연세가 있으실때에도 택시를 타시지 않고 늘 걸어 다니셨다. 왠만한 거리는 걸어서 다니시고 못가는 거리만 버스를 타셨다. 지금 생각하면 참 검소하셨다. 우리가 다녔던 나의 모교회와 할머니집 아파트까지는 거리가 꽤 되었는데 예배를 드리러 교회를 갈때나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갈때나 차를 타시지 않으셨다. 차를 타시라고 말씀을 드려도 늘 걸어서 다니셨다. 대답만 그래.... 하시고.

평생 일을 하시면서 한닢 두닢 모으셔서 성인인 자식들을 도와 주셨고 스스로 본인의 삶을 책임 있게 사셨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전부터 외할머니께서는 남편의 빈자리를 고생으로 채우면서 사셨다. 내가 성인이 되고 결혼하여 자녀들을 낳고 키우면서 외할머니를 생각하면 우리 외할머니 얼마나 힘드셨을까?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외할아버지 없이 마음이 그랬다. 이 세상 사시면서 오만가지를 다 경험 하셨을텐데 끝까지 최선을 다하시고 마무리까지 잘 하신 우리 외할머니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외할머니를 직접 뵈었던 20129월에 외할머니께 맛있는 식사를 사드리고 작지만 용돈을 30만원 드리고 집에서 큰 절하며 인사를 드리며 어쩜 이렇게 볼 수 있는 날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고 말씀 드리고 서로 눈물을 흘리며 포응을 했었는데 정말 그렇게 되고 말았다.

매년 전화로 인사는 드리고 안부도 전하고 증손자들과도 통화도 했었지만 캐나다에 살아서 가까이에서 자주 볼 수 없는 것이 늘 마음에 많이 죄송했었다. 그래도 외할머니께서 이해하시고 "너희들 잘 살면 그것으로 나는 행복하다"하셨던 외할머니 말씀 잊지 않고 부끄럽지 않는 삶, ...끝까지 살고 가겠습니다. 제가 어려서 더 이해 못하고 더 잘해 드리지 못한 것이 많이 아쉽습니다. 천국에서는 모든 짐들 내려놓으시고 평안하세요. 사랑합니다. 외할머니.

우리 외할머니 입관예배를 실시간으로 함께 드리고 기념으로 사진 한컷 남겼다. 부산 빈소에 가지 못한 형의 마음을 알고 내 동생이 실시간으로 슬퍼하며 보여줬다. 모 교회 담임 목사님께서 기도해 주셨고, 가족들 모두 병원에서 외할머니와 인사를 나누었지만 관을 닫기 전 인사 한번 더하고, 우리 식구도 인사하고..함께 기념할 수 있는 시간을 보냈다. 겸사 겸사 우리 아들 의현이 시현이 친척들과 인사도 나누고 함께 슬픔을 기쁨으로 나눌 수 있어 감사했다.

외할머니께서 사셨던 세상은 시작부터 참 힘드셨는데 그 힘든 세상을 잘 이겨내시고 잘 사셔서 가족들 모두 행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우리 아버지께서 장모님의 소천에 엄청 눈물 흘리시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니 장모님이신 우리 외할머니가 참 고마웠나보다.

나 또한 우리 장모님과 장인 어른이 참 감사하고 은혜를 갚을 수 없을 만큼 고맙다.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잘해드리도록 노력해야겠다. 우리 외할머니, 이제 가족들 걱정 하시지 마시고 주님과 함께 즐거운 일들만 있으시기를 손자가 기도드립니다. 86년 동안 정말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사랑합니다. 할머니.

<두 번째글>

나는 부산에서 태어났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늘 함께 했던 사람들이 부모님과 외할머니와 어머니 밑에 둘째 동생, 이모, 셋째 동생, 외삼촌이었다. 큰 외삼촌은 내 기억으로 신학을 공부하고 수원에서 사역을 하셨다. 내가 외가, 친가쪽에선 첫번째 손자라 사랑을 듬뿍 받았다.

우리 아버지께선 내가 태어나고 얼마 후부터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에 가셔서 건설 일을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어릴때부터 손재주가 좋으셔서 가구를 만드는 목공 기술을 시작으로 목공소도 하셨고 그러시다가 건축일까지 배우셨다. 지금도 건축업, 실내 디자인을 하고 계시지만 그 당시 맨손으로 누구의 도움없이 일어서기 위해 더운 중동에서 일을 하셨다.

그래서 늘 나를 케어해 주셨던 분이 외할머니와 이모였다. 이모가 졸업 후 직장을 잡고 일을 다니면서 주말엔 이모가 나를 많이 케어해 주셨던 걸로 기억에 남는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쯤 이모가 결혼하고 시집을 창원으로 가셨다. 엄마와 같은 우리 이모가 떠나고 외할머니와 우리 식구가 함께 살았다. 내가 좀 컸을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외할머니께서도 일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에 남는다.

집 안에 어른들은 모두 바쁘게 일을 하시면서 사셨던 것 같다. 늘 학교를 다녀오면 집엔 나와 4살 밑에 동생 뿐이었다. 그래도 외로움 없이 성장한 것 같다.

우리 외할머니를 생각하면 평생 일을 하셨다. 아주 어릴적 기억엔 도서관에서 청소 일을 하셨고 그 후 지하철역, 대학교 등 청소와 관련 된 일을 주로 하셨다. 배운 것 없고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을 당시 뭐라도 해서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으시기 위해 선택하셨던 일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85세였던 지난 해 까지 동사무소에서 주는 작은 일거리를 하셨다라는 얘기를 어젯밤 이모를 통해 들으면서 끝까지 본인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시고 최선을 다하셨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거기다 어제 어머니께서 기차타고 내려가시는 동안 통화를 하면서 두달 반 우리집(큰딸집)에 같이 있으시면서 행복해 하셨고 그 동안 일 하시면서 병원비, 장례비용 모두 다 모으셨더라는 얘기를 듣는데 더 마음이 울컥하고 눈물만 났다. 우리 외할머니 끝까지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으시려고 좋은 모습만 보이시고 가셨다.

25. 고생은 좀 하셨지만 가족들 모두 보고 난 후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평안히 천국 가셨다라는 얘기를 들으니 감사하다. 할머니 너무 보고 싶어요. 너무 사랑했었고, 너무 죄송해요. 가보지도 못하고. 그래도 영상 통화도 하고 여러번 할머니 목소리 들을 수 있어서 감사했어요. 저도 열심히 살다가 때가 되면 갈께요. 사랑합니다. 할머니, 천국에서 뵈요.

<세 번째글> 나의 모교회 성도님들께.

담임으로 계시는 이장만목사님과 우리교회 출신 강성기목사님, 그 외 많은 목사님과 성도님들 감사합니다. 다음에 한국가면 찾아 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 우리 할머니 제가 없는 동안 예배 잘 드릴 수 있도록 신경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회 동생들, 동기..그리고 형, 누나들..감사하고, 나의 은사님들..감사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모두 주 안에서 사랑하고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반송송서침례교회...교회의 건물만 작고 훌륭한 성도로 꽉찬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교회다. 50년 동안 정직하고 바른 목사님들을 정말, 많이 배출했고 지금도 국내에서 국외에서 열심히 목회를 다양하게 하고 계시다. 배출된 목사님들은 이름만 목사가 아닌 정말,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고 계시다.

글쓴이 김종옥 성도 / 캐나다 이민, 사랑샘침례교회 이현봉 목사 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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