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단강 도하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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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현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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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단강 도하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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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3:1-17
새해가 되면 모든 개인 가정 교회 국가 각 기관 단체가 다 일 년 동안의 계획을 세우고 구상을 합니다. 이해가 작년보다 더 나은 해가 되기를 바라지만 어떻게 설계를 하고 작전 계획을 세워야 되는지를 생각해 보는 시점에 서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를 거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복지를 들어갈 때 최후로 요단강을 건너야 그 땅에 발을 디디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강물이 한참 불어서 좌우편 언덕에 넘치고 물살이 센 때였습니다. 그때 그 많은 민중을 거느린 지도자 여호수아도 그 강을 건너보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60만이 넘는 민중을 여간한 나룻배 몇 척으로는 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한 해의 출발점에서 미지의 세계를 걸어가는 우리들이요 허다한 난관을 뚫고 나가야 할 우리들에게 그들의 요단강 도하작전은 큰 교훈을 주는 것으로 믿고 이 말씀으로 은혜 받고자 합니다.
1 .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400년 동안 종살이하던 애굽을 탈출한 것이나 광야 40년의 고난의 여정을 걸어간 것이나 범람하는 요단강을 건너가려고 한 것이나 그들의 목표는 가나안 복지를 점령하는 것이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을 획득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가나안을 점령하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기도하고 10년 20년 30년 혹은 그 이상을 하고 있는데 그 길의 목표를 어디에 두고 있는 것입니까? 목표 없이 걸어간다는 것은 참으로 무의미한 것입니다. 목표 없이 걸어가는 길은 아무런 희망도 열심도 소명도 없는 길이요 시간만 낭비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지상에서는 하나님나라 건설이고 최종적으로는 하나님나라 입국입니다.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 건설하는 일은 유럽에서 배워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가 국민의 종교로 돼 있는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는 그들의 조상은 바이킹인데 해적이었습니다. 덴마크가 지금은 문명국이 되고 GNP가 5만 불이 넘는 국가가 됐는데 해적의 후예들이 모범적인 복지국가를 이룬데 는 기독교 신앙의 힘이었습니다. 땅을 파도 석탄 한 톨 나지 않는 빈껍데기에 여름에도 서리가 와서 농사에 큰 타격을 주고 바람이 심해서 곡식이 다 쓰러지는 악조건에다가 곡창지대는 전쟁으로 빼앗기고 전쟁에 패하고 나서 젊은이들은 살길이 없어 희망을 잃고 댄스홀이나 다니며 놀다가 죽자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그룬드비목사 달가스 같은 지도자가 나타나서 밖에서 잃은 땅 안에서 찾자, 무기로 잃은 땅 호미로 찾자,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자고 구호를 외쳤는데 모두가 호응을 해서 바다 밑 오리 이상을 파고 들어가서 시멘트 원료를 끄집어내고 공장을 돌리려니 전기가 있어야 되는데 물이 없으니 수력발전도 석탄이 없으니 화력발전도 못하고 이웃나라에서 쓰고 버린 석탄찌끼를 배로 실고 와서 화력발전을 해서 시멘트공장 기계를 돌리고 점심 빵을 싸다놓고 점심시간도 없이 한손으로 빵을 집어 먹으면서 한 손으로 기계를 돌리고 부지런히 일하다가도 토요일 오후는 일체 공장 문을 닫고 주일준비를 하고 주일이 되면 교회로 나갔습니다.
빈껍데기에서 국민소득 5 만 불이 넘는 국가를 만든 것이 그들의 기독교 정신의 힘이었습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들의 뿌리는 해적이지만 도둑이 없는 나라를 만들어 놓아서 도둑 잡는 경찰관이 아니라 러시아워에 교통정리나 하는 경찰이고 교도소에 가면 어떤 때는 죄수가 하나도 없을 때가 있고 어떤 때는 두서너 명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제구실한다면 이런 이상적인 나라를 목표로 삼고 나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웃끼리 믿지 못하여 담을 치고 잠을 통을 잠그고 빗장을 지르는 사회는 불안하지 않습니까? 교회는 이상적 사회의 모범이 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우리는 지상에 하나님나라를 건설하면서 미래의 천국을 바라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누가 안겨다 주는 것이 아니고 점령하는 것이고 건설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교회 숫자가 불어나고 기독교학교 기독교 기관이 많고 선교활동도 많이 하는데 사회변화는 없습니다. 여전히 도둑이요 강도요 살인이요 불신이 천지를 뒤덮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좌절하고 말 것입니까? 그래서는 안 됩니다. 더 분명한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유리방황하는 동안에 애굽에서 나온 60만 장정 중에 끝까지 살아남은 자는 여호수아, 갈렙 두 사람뿐이었고 모두가 광야에서 난 2세들이었으나 마지막 고비인 요단강을 앞에 놓고 그들은 건널 일이 막연했으나 실망하지 않았고 목표를 꺾지 않았습니다. 기필코 가나안 땅을 점령하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결코 평탄한 것이 아닙니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험하고 어려운 길도 많았으나 내 목표를 꺾지 말아야 합니다. 결코 이상국을 건설하리라 이상적인 교회를 만들리라 천국을 빼앗으리라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목표를 세워놓고 진행한다 해도 도중에 장애되는 일들이 많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런 험난한 길에 부닥쳤을 때도 목표를 꺾지 말아야 합니다. 이 목표는 하나님과 함께 세워 놓은 것이고 또한 하나님이 이루실 것입니다.
2 . 하나님께 물어보고 그 지지에 따라야 합니다.
우리나라 격언에‘아는 길도 물어가라’고 했는데 우리가 가는 길은 알지 못하는 길입니다. 본문 3:4에 ‘그리하면 너희의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 보지 못하였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지도자 여호수아를 비롯하여 거기 둘러선 60만 이상의 무리 중에 아무도 그 강의 깊고 낮음을 아는 사람이 없었고 그 물을 건너는 방법을 일러준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런 때 그들이 취한 태도는 하나님에게 기도하여 물어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강의 주인이요 그 물의 깊고 낮음을 아시는 이요 그 물의 세력과 움직이는 모든 일을 좌우하시는 신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그들이 40년 광야생활을 지나오는 동안에 그들이 길 없는 광야를 헤맬 때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을 보내셨고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을 것을 아신 하나님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주셨고 사막에 물이 없을 것을 아시고 산기슭의 샘터로 인도하셨고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셨습니다.
이 경험을 되살려 그들은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하여 물어봤을 때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건널 방법을 일러주시고 건너는 일에 도와주실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그 약속을 믿고 순종하여 그 수다한 백성과 우양과 온갖 소유물을 다 가지고 요단강을 안전하게 건너서 허락의 땅에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앞날을 안전하게 지나려면 하나님께 물어봐야 합니다. 그리고 앞길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앞날의 주인이시오 앞날을 좌우하사 평안케도 하시고 어지럽게도 하실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잠 16:9에‘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요단강을 건너간 방법은 곧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방법을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계신표로서 하나님의 율법이 담겨있는 법궤를 어깨에 메고 앞서가고 군중은 법궤멘 제사장들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였습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지도대로 발을 옮겨 앞으로 나가니 물결은 멈추고 바닥이 들어나서 안전하게 걸어갔던 것입니다.
사람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하나님은 길을 열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앞날을 예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모든 필요를 미리아시고 대비해 주십니다. 물, 공기, 햇빛 온갖 자원들을 다 인간의 삶과 복리를 위하여 예비해 주신 것입니다.
이사야 65:24에‘저희가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참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사람 수백 명을 태운 비행기가 자주 추락하기도하고 납치되기도 합니다. 테러가 일어나면 수많은 생명들이 갑자기 죽기도하고 아파트가 무너지기도 하고 화재사고가 나서 생명이 죽기도하고 악질 병이 유행하기도하고 지진, 해일이 일어나 10여만 명의 사망자와 실종자를 내기도하고 태풍에 배가 침몰하기도하고 기차 고속버스의 사고 등으로 목숨을 잃는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가야할 미지의 세계를 어떻게 해야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습니까? 불의의 사고와 무수한 역경이 잇는 이 세대에서 앞날의 주인이시오 앞날을 좌우하시는 하나님께 물어보고 그 지도를 따라야 합니다.
여행자에게 필요한 것은 안내판과 등대와 나침판입니다. 언젠가 제주도에서 부산으로 오는 배 남영호가 침몰하여 326명의 승객이 익사하고 12명만이 구조된 일이 있었는데 조사결과 선장과 선원이 무자격자요 조난의 신호를 받고도 잠만 잔 탓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 스스로 인생의 안내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년 초가 되면 길거리에 앉아 사주팔자를 보는 사람들이 재미를 보는 것은 혹시나 액을 막고 복을 받을 길이 거기에 있을까 하고 기웃거리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헛된 속임수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독교 지도자라 하면서도 진리를 떠나 비진리를 가르치는 이단자도 있고 사이비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따라 가다가 패가망신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참된 지도자 하나님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사람은 홍해가 갈라질 것도 믿을 수 있고 요단강이 끊어질 것도 믿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백성이 애굽을 탈출해서 첫 번째 큰 장벽은 홍해였는데 거기서 지도자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지팡이를 내밀어 바다가 갈라지게 해서 육지같이 길을 내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전 또 하나의 큰 장벽은 범람하는 요단강을 건너는 일이었는데 그때는 하나님께서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지시하신대로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강물에 들어서라고 명하셔서 그대로 순종했더니 강물이 끊어지게 하여 길을 내게 하셨습니다.
모세의 지팡이나 제사장의 법궤나 그 자체에 마술 같은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에 따랐을 때 하나님의 권능이 역사한 까닭이었습니다. 바다와 강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바다를 갈라 놓을 수도 있고 흐르는 물을 끊어지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병자를 위해 기도한다는 사람이 주먹으로 병자를 두들겨서 죽게 한일이 있는데 기도하는 사람의 주먹에 권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할 따름입니다. 과거 우리나라에 재벌총수가 자살한 일도 있고 장래 크게 뻗어 나가야할 젊은 학생들이 잠시 당하는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자살한 일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앞에 놓인 홍해 요단강 같은 큰 장애를 스스로 넘어보려고 하다가 넘지 못하니까 목숨을 끊음으로 해결한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문제에 부닥쳤을 때 그것을 대처하는 방법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지시에 따르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지시에 따르면 홍해도 갈라지고 요단강물도 끊어지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3 . 믿음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우리의 목표가 분명하고 하나님의 지도를 따라 가는 것이라면 오직 전진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전진하는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너는데 는 비록 하나님의 기적으로 준비하신 길이었지만 거기에도 평탄한 길은 아니었습니다. 높은 비탈도 있고 거친 바위와 날카로운 돌도 많고 미끄러운 개흙바닥도 있고 푹푹 빠지는 모래 바닥도 있고 흐르는 물이 한데 모여 위협하는 듯이 벽을 이루어 있었습니다.
이 길을 그들은 오직 믿음으로 반드시 승리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전진한 것입니다. 이 전진에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대 모험을 한 것입니다. 바다 가운데 계신 예수님을 보고 물 위로 걸어간 베드로는 믿음이 있을 때는 전진했지만 믿음이 떠날 때 빠져 버렸습니다.
민수기 13-14장에 이스라엘 백성이 바란광야에 이르렀을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여 가나안 땅에 정탐꾼을 보내어 그 땅을 탐지하게 하셨을때 모세는 하나님의 명에 따라 각 지파에 한 사람씩 12사람을 보냈습니다. 탐지하고 돌아온 사람들의 보고는 두 갈레로 갈리었습니다. 그들 중 몇 사람은 그 땅의 거주민은 강하고 성은 견고하고 심히 커서 우리는 거기 비하면 메뚜기 같더라고 절망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오히려 백성을 안돈시키면서 우리가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능히 이길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고 희망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다 같이 땅을 탐정한 사람들이었는데 어째서 몇 사람은 졸장부 같은 보고를 했고 두 사람은 대장부 같은 보고를 했습니까? 문제는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다 같은 사실이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과 불신의 눈으로 보는 것은 이렇게 차이가 있습니다. 다 같은 사건이지만 믿음으로 해결하는 것과 불신으로 해결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다 같은 교회이지만 믿음으로 모이는 교회와 믿음 없이 모이는 교회와는 그 움직이는 모습이 차이가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초기 선교시대는 타오르는 믿음의 불길이 순식간에 퍼져나가서 교회는 날로 확장되나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외형에 치중하고 내실에 빈약합니다. 믿음이 식어진 탓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에는 모험이 따르는 것입니다. 물질과 몸과 생명과 위험도 무릅쓰는 모험이 따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고향과 친척도 버리고 미지의 땅을 바라보고 출발하여 전진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자기의 명예와 위신과 체면을 생각지 않고 복음을 위하여 생명을 내 놓았던 것입니다. 믿음에는 오직 전진이 있을 뿐이요 퇴보는 있을 수 없습니다. 고난과 역경이 앞을 가로막을 떼에도 목표한 그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퇴보하지 않는 것이 신앙자의 생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과거를 돌아보면 애굽의 종살이에서도 탈출했고 홍해도 건넜고 광야의 고생도 거쳤고 요단강도 건넜으니 이제는 편히 쉬겠다고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넌 후에도 가나안 본토에 살고 있는 이방족속들을 싸움으로 물리치고 점령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때에도 하나님은 9절에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하고 10절에 살아 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셔서 가나안 족속과 헷족속과 히위족속과 브리스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반드시 쫓아내실 줄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아직도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까지는 물리쳐야할 적이 많지만 하나님께서 쫓아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복전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전투였기 때문에 반드시 이긴다는 것입니다. 이 싸움에 승리하기 위해서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당부한 말이 5절에‘너희자신을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힘은 성결에서 얻습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심령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과거 믿음의 행진에 하나님의 능력을 많이 체험했지만 미래의 행진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바라는 우리는 여호수아가 한 말대로 우리 자신을 성결하게 해야 합니다. 영적인 전투력은 마음을 씻고 성결케 해야 얻습니다. 더러운 죄악들을 고백하고 씻음 받고 강력한 영적 힘을 가지고 전진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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