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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에 실린 표수다선교사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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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0-06-16 00:00 조회1,41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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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에 실린 표수다 선교사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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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년간 헌신한 포스터 선교사…


안 먹고 안 입어가며 어려운 사람 도와


 


우리가 당신에게 드린 건 한국 이름 표수다 뿐인데


당신은 모든 것 주고 떠나셨군요!


  지난 11일 오전 9시 서울 행당동 성서침례교회 중앙예배실을 검은 옷을 입은 300여명이 가득 채웠다. 지난 4일 별세한 고(故) 아이작 포스터(Issac Foster·87)씨의 발인 예배를 위해 전국에서 모인 추모객이다.

고인의 한국 이름은 포스터의 한국식 발음인 표수다이다. 6·25전쟁 후 56년간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목사인 그의 양아들 폴 포스터(56)씨가 "검소했던 아버지는 옷은 옷일 뿐이라며 한 번 사면 50년 동안 입었습니다. 그렇게 아낀 돈을 모두 어려운 사람을 위해 썼다"고 고인을 기억하자 장내는 눈물로 가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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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 별세한 선교사 포스터씨의 생전 모습. 추모예배에서 이정범 목사는 “우리가 그에게 드린 것은 ‘표수다’라는 이름밖에 없지만 그분은 모든 것을 주시고 떠나셨다”고 했다. 교회 측은 고인이 기거하던 집을 ‘표수다 선교사 기념관’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성서침례교회 제공

 

  이날 폴 목사의 이야기를 통역한 김희옥(64) 목사는 "나도 중·고교 시절 고인이 학비를 대주신 덕에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고 했다. 1962년 고인은 형편이 어려운 김 목사 가족을 교회에서 머무르게 하면서 영어를 가르쳤다. 그를 아버지라 부르며 따르던 소년은 20여년 후 목사가 됐다.

  미국 텍사스주 캐슬베리 침례교회 소속인 포스터씨는 2차대전 때
일본에서 선교사로 있다가 6·25전쟁 직후 한국에 와서는 참상에 충격을 받아 일생을 한반도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는 1954년 미군부대에서 버린 헌 자재를 구해 서울 행당동에 남루한 집을 짓고 부인과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밤에도 전등을 켜지 않았고 "라면이 제일 맛있다"면서 하루 2끼 중 한끼를 라면으로 때웠다. 교인들이 TV나 컴퓨터를 선물하면 남몰래 내다 팔아 그 돈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왔다. 고인이 떠난 집의 한구석에 4년 전 지인들이 선물한 에어컨이 포장도 뜯기지 않은 채 놓여있었다고 한다. 40여년 동안 그를 지켜본 이정범(58) 목사는 "어떨 때는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검소했지만 정말 따뜻한 영혼을 가진 분"이라고 했다.


  그는 1950년대 중반 의정부 고아원에서 혼혈 전쟁고아 둘을 입양했다. 3년 전 작고한 부인 제인 포스터(Jane Foster)씨는 젊은 시절 자동차사고로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이후로도 수십년 그 고아원을 후원했고, 왕십리에서 빈민들에게 빵·우유를 나눠주기도 했다. 그는 1955년 성서침례교회 교단을 세우고 예배당을 지을 때는 승용차를 팔았다. 1967년 성서침례신학교를 공동설립한 후에는 매년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줬다. 기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몇년 전까지도 주말마다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아이들은 키 198㎝의 그를 표수다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랐다.

 

6월 15일자 조선일보에사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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