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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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과 얼굴사이에서(여호수아 4: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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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09-01 00:00 조회8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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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과 얼굴사이에서(여호수아 4:11-13)


지금 우리는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많은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 땅에 세워진 이래 전쟁이나 강점기를 제외하고 예배당 문을 닫는 것은 처음일 것입니다. 어찌 보면 전쟁보다 무섭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더 많은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스스로 지혜로운 자리에 서야하며, 소금과 빛으로 두려움에 빠진 국가 전체를 생각해야 하는 입장에서 영상으로 실시간 예배를 드리는 방법으로 대처했습니다.


우리가 한 자리에서 예배드릴 수 없고, 교회당 안에서 교제는 할 수 없다 해도 도리어 예배의 귀중함과 하나님을 사모함으로 하나님을 더 가까이 경험할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얼굴과 얼굴사이라는 설교는 4번째 요단강 도하와 관련된 말씀으로 우리가 건너야 할요단강들 앞에서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요단강 도하의 비결 하나를 더 배우게 되었습니다.그것은 여호수아 3-4장에서 12번이나 등장하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파님:얼굴> 그것은 ‘앞에서/목전‘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파님"인데 흥미롭게도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얼굴이든지 백성들의 얼굴이든지가 됩니다. 이 파님이라고 하는 단어가 여호수아 3장에서는 6절에 두 개 그리고 10,11,14절에 나타나고, 4장에서는 5,7,11,12,13,23절 두 개가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요단강을 건너는 이 이야기 속에는 파님(얼굴) 모티프, 얼굴이라는 특별한 구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요단강을 도하할 때 하나님 얼굴과 백성들 얼굴이 아주 가깝게 해서 건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파님과 파님 사이가 언약적 관계를 잘 표현해 준다고 봅니다. 하나님에게서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의 백성입니다. 호세아에서 표현하듯이 마치 하나님과의 결혼관계와 같은 것입니다(호2:19-20). 12번의 친밀한 표현으로써의 요단강 도하는 언약 안에서 하나님 얼굴과 이스라엘 얼굴사이의 친밀감에 대한 스토리처럼 보입니다. 이유는 언약에는 친밀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친밀감이란 다분히 조용하고 분위기 있는 곳에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 연인과의 관계를 연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앞에서(파님/얼굴)은 하나님이나 그 백성이 움직일 때 마다 사용됩니다(수3:6,8).


언약궤가 움직일 때는 그 백성 얼굴 앞에서 움직이고, 그 백성들은 여호와의 궤 앞에서 건넙니다.여기에 감동이 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조용히 하나님과의 묵상과 예배에서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움직일 때도, 어려운 요단강을 건너야 할 때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요단강 도하 이야기는 하나님 아버지가 친밀함의 주도권을 갖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예배당에서 공적예배는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한 가지 더 발견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즉 친밀함으로 하나님의 얼굴과 우리의 얼굴이 가까이 있을 때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는 것입니다.


< 두 파님 사이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


오늘 본문의 12번의 하나님의 파님과 이스라엘의 파님 사이에서 특징은 두 파님 사이에는 아무것도 끼어든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한 가지 놓여 있는 것이 있다면 요단강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면전과 이스라엘의 얼굴 사이에 그것은 장애물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가나안의 일곱 족속도 방해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언약관계의 특징입니다. 즉 그 관계 속에 어떤 것도 개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앞에 있는 요단강의 존재를 어떻게 인식해야 하느냐?의 문제가 남습니다. 그것은 있어도 없는 것으로 간주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하나님만 바라보아야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3-4장은 요단강은 있지만 없는 것 같이 되는 것이 요단강 도하 이야기입니다. 즉 하나님 얼굴과 이스라엘 얼굴사이에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을 때 요단강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고 길을 열었습니다. 강물을 보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진이나 방송 화면을 보면 주인공이나 주제가 되는 것 보여주는 기법을 “아웃 포커싱” 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내가 보고자 하는 것만 뚜렷하게 보이고 나머지는 흐릿하게 하는 것입니다.드라마에서 보면 시장터에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갑니다. 그런데 카메라는 그 주인공만 돋보이게 클로즈업 합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 그 사람만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그런 사이로 요단강을 건너갈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앞에도 수많은 요단강들은 있지만 없는 것처럼 하나님 얼굴만 집중하고 건너야 합니다. 하나님만 돋보여야 합니다. 장애물이 있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35, 38-39절은 장애물이 있지만 하나님과 나 사이에 사랑의 줄을 끊을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장애물을 맞이합니다. 특히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예배가 없음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나 사이가 이런 것으로 절대로 무너질 수없다는 고백과 신앙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점검할 때인 것 같습니다. 진짜 무서운 것은 바이러스가 아니라, 우리와 하나님사이에서 그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는 것들입니다. 이번 기회에 회개하면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없애야 하는 것을 내려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파님’과 ‘파님’ 사이에 어쩔 수 없이 끼여 있는 요단강에 압도당하지 말고 극복하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의 삶에 하나님만 부각되는 삶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만 당신의 눈에 들어오는 자로 삼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크게 느껴질 수 있으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더 크게 보이고 느껴져야 할 때입니다.


< 결론/우리는 언약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언약의 백성인 우리를 주님의 십자가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앞을 가리는 수많은 산 같은 요단강이나 골리앗이나 풍랑이 일어난다고 해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랑 되신 예수님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주님의 거룩한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를 찬송과 고백은 시편 121편 1절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마지막으로 민수기 6장25-26절 말씀으로 축복합니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


<2020년 8월23일 2020 사랑샘가족 하기수련회 두 번째 설교중에서>


글쓴이 / 신지균 목사/ 서마산교회 담임목사, (사)사랑샘공동체 지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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