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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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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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병구
작성일13-05-30 00:00 조회44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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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


본문 : 눅10:25-37


일자 : 2011.11.6.


장소 : 사랑샘침례교회, 사랑샘사역18주년기념예배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를 알려면 평소에 그 사람이 어떤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질문을 하냐를 보면 알 수 있다. 사람들의 먹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질문하는 사람은 경제학자일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의 정치성향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질문하는 사람은 정치가일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의 웃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질문하는 사람은 개그맨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영생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질문을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가요. 십중팔구, 종교인일 가능성이 높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한 율법사가 나온다. 율법사는 성경을 연구하는 종교인이다. 이 율법사는 예수님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25절)”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 깊은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저 하루하루 살기에 급급하다. 눈에 보이는 것과 감각을 자극하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다. 철학적인 질문이나, 영적인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율법사의 질문은 정말 좋은 질문이다. 칭찬을 받을 만하다. 그런데 문제는 질문의 의도와 동기다. 1절을 보면 이 율법사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질문을 던진 것이다. 네가 정말 메시야라면 이 정도는 가볍게 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예수님은 짧은 공생애를 사시면서 많은 시험을 받으셨다. 공생애 초기에 광야에서 마귀에게 3가지 강도 높은 시험을 받으셨다(마4장). 첫째는 40일을 굶주린 예수님에게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시험이었다. 두 번째는 성전꼭대기에선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는 시험이었다. 그리고 높은 산에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다 보여주고 내게 엎드려 경배하라는 시험이었다.공생애 말기에는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위에서 사람들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네가 메시아면 너 먼저 구원해보라”는 시험을 받으셨다.



이처럼 많은 시험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장에서 제자들을 향해 아주 의미 있는 말씀을 하셨다.“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눅22:28).”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예수님처럼 영적으로, 육적으로 많은 시험을 통해 예수님의 제자 됨을 스스로 증명해가는 사람이다. 시험이 없이, 어려움이 없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에 시험이 오고,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닥쳤을 때 이렇게 생각하세요.“이게 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이구나.”이 시간 저는 예수님과 율법사와의 대화 속에 담겨 있는 영적인 교훈을 함께 나누길 원한다.



하나님 말씀 안에 있는 영생



첫째는 영생은 하나님 말씀 안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질문해 온 율법사 앞에서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율법사에게 역질문을 하셨다.“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26절).”만일 질문 한 사람이 베드로처럼 고기 잡는 어부였다면 예수님은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봐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질문 한 사람이 율법전문가였기에 고기 잡는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다. 율법사에게는 율법을 가지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율법사는 이렇게 대답한다. 27절이다.“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아주 깔끔한 대답이다. 율법사에게 이 말씀은 기초 중에 기초다. 이 말씀은 율법의 주제라 할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한다면 우상을 숭배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떠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을 수 있겠는가. 주일에 예배를 빠지고 여행갈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1계명에서 4계명까지 다 지킬 수 있다.



그리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한다면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같은 5계명에서 10계명까지를 범할 수 있겠는가. 다 킬 수 있다는 말씀이다. 이 율법사의 대답은 만점짜리 대답이다. 예수님도 율법사의 대답에 더 이상 토 달지 않았다. 그냥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28절)”말씀하셨다.



그렇다. 영생은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다. 영생은 뉴턴이나 아인슈타인 같은 유명한 과학자의 실험보고서에 있는 게 아니다. 칼 마르크스나 체게바라 같은 뛰어난 혁명가의 이론에 있는 게 아니다. 피카소나 베토벤 같은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에 있는 게 아니다. 영생은 하나님 말씀 안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



참된 이웃이신 예수님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두 번째 영적교훈은 예수님은 우리의 참된 이웃이라는 것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한다. 율법사는 예수님을 시험하러 왔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듣자 날카롭던 마음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예수님께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



“그러면 예수님,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29절).”



그러자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아는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다. 어떤 분들은 이 이야기를 비유로 본다. 예수님이 이웃이 누구인지 설명하기 위해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하여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의 등장인물이 네 사람인데 네 사람 중 세 사람이 유대인이고 한 사람이 사마리아인이기 때문이다.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사이가 아주 안 좋았다.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인간보다는 못하고 짐승보다는 좀 나은 존재로 보았다. 한마디로 인간이하의 취급을 했다. 여러분, 누가 나를 무시하면 기분 좋겠어요. 그래서 사마리아인도 유대인 하면 치를 떨었다. 그런데 예수님도 유대인이요, 율법사도 유대인이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도 대부분 유대인들인데 이런 상황 속에서 자기들을 나쁜 사람으로 설정하면 누가 좋아하겠는가.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지어낸 픽션이 아니라 당시 유대사회에 일어났던 팩트를 근거로 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 이야기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서 시작된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까지는 대략 육 십 여리 거리다. 예루살렘은 높은 산 위에 있고 여리고는 낮은 곳에 있어 고도차이가 1,200미터쯤 나는 험한 길이다. 길이 험하다보니 종종 이 길에서 강, 절도 사고가 일어났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선에 육십령고개가 있다. 왜 육십령고개라고 했냐면 이 고갯길이 하도 깊고, 험하다 보니 후미진 곳에 강도들이 숨어 있다 지나가는 행인들을 괴롭혔다. 그래서 고개 밑 주막에서 육십 여명 가량이 모여야 안심하고 함께 고개를 넘었다고 해서 육십령고개라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욱십령고개처럼 험한 길을 한 유대인 여행자가 지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강도들은 인정사정없이 때리고, 옷을 벗기고, 돈을 뺏고, 흉기로 찔러 거반 죽게 만들어 놓고는 도망가 버렸다. 마침 그 곳으로 제사장이 지나가고, 레위인이 지나갔지만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보고도 피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겨 응급조치를 취한다음 자기 짐승에 태워 가까운 주막에 데리고 가서 밤새 정성껏 돌보았다. 다음날 주막집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 그러니까 우리 돈으로 한 20만원을 주며 강도만난 사람을 잘 돌보아 줄 것을 부탁했다.



이렇게 이야기를 마친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물었다.“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36절).”그러자 율법사가 뭐라고 대답했나요.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37절).”여러분, 왜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하셨을까요. 자비를 베푸는 삶은 가르쳐 주기 위해서일까요. 그리고 자비를 베풀면 영생을 얻는다는 행위구원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일까요. 아니다. 이 이야기의 진정한 목적은 그때까지 스스로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자부하던 율법사가 그동안 보지 못하던 자기의 치명적인 약점을 보여주므로 아, 나의 의로는 영생을 얻을 수 없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기 위해서다.



예수님은 종종 이런 방법을 쓰셨다. 마19:16 이하를 보면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예수님은 계명을 다 지키라고 한다. 그러자 부자 청년이 당당하게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나이까한다. 이때 예수님께서 뭐라 하였나요.“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자들을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하셨다(마19:21). 왜 이같은 말씀을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부자청년에게 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해서 섬길 수 없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시기 위해서다.



더 나아가서 이 이야기의 목적은 강도만난 사람을 아무 조건 없이 불쌍히 여겨주고, 구해주고, 다시오면 추가 경비까지 갚아 주겠다고 희생적인 사랑을 보여준 사마리아인이 바로 예수님 자신임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그렇다. 예수님은 강도만난 자에게 자비를 베푼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으신 분이다. 우리 인생 무엇인가. 죄를 짓고 하나님 곁을 쫓겨난 인생이다. 영적 예루살렘을 떠난 인생이다.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처럼 불순종의 길을 가다 강도 사단을 만나 거반 죽게 된 인생이다. 영적으로 강도 만난 인생이다.



영적으로 강도 만난 인생은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종교인들이 구원할 수 없다. 보리수 밑의 싯달타가 구원할 수 없고, 사막의 마호메트가 구원할 수 없다. 통일교의 문선명이 구원할 수 없고, 신천지의 이만희가 구원할 수 없다. 누가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구원할 수 있는가. 누가 이 무서운 죽음의 계곡에서 구원할 수 있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 밖에 없다.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아무 부족한 것이 없고, 아무 어려우신 게 없는 분이다. 그런데 딱 한 가지 마음이 아픈 게 있었다. 우리 인생들이 죄 속에서 태어나 죄를 짓고 살다가 죽어 불지옥에 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 사이에서 고통당하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에 예수님은 도저히 하늘 보좌에 그냥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자리를 내려놓고 낮고 천한 이 땅에 내려오셨다. 이 땅에 오셔서 영적으로 강도 만나 거반 죽게 된 우리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불쌍히 여기사 하나님 말씀으로 치료해주시고,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우리 죄를 사해주셨다.



강도 만나 죽어가던 사람에게 참된 이웃이 불쌍히 여겨 구원해준 사마리아인이었다면, 죄와 사망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의 참된 이웃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누가 참된 이웃인가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세 번째 영적교훈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참된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을 보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었다. 보통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 일을 할 대에 순번대로 돌아가며 한 달씩 봉사했다. 아마도 두 사람도 순번이 되어 한 달간 제사장직을 수행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제사장과 레위 인은 성전에서 한 달 동안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을까요. 얼마나 많은 시편의 말씀을 들을 읽었을까요. 예복을 입고 두 손 들고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고 찬송했을까요.



쉽게 말하면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입니다. 은혜 많이 받고 지금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막상 그 은혜를 나눠야 할 대상을 보았을 때 슬금슬금 그 자리를 피했다. 그렇다면 이들이 받은 은혜란 어떤 은혜인가. 오늘 우리도 잘못하면 이들과 같이 될 수 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 앞에 와서 말씀을 듣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은혜를 많이 받고 돌아가지만, 막상 가정이나 직장에 돌아가서 사랑해야 할 사람, 불쌍히 여겨야 할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하는가. 양심에 찔림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지난 9월26일부터 10월15일까지 전국 16~69세 남녀 1,51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한국의 사회문화 및 종교에 관한 대국민 여론조사’를 했다(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 그 결과 사회 각 분야의 신뢰도에서 종교계가 5점 만점에 신뢰도 3.00을 기록, 의료계, 시민사회단체, 학계, 대기업(3.12)에도 미치지 못했다. 또, 종교별 신뢰도에서는 가톨릭(4.11), 불교(4.05), 개신교(3.34), 원불교(2.31), 이슬람(1.20) 순이었다. 한국 사회에 미치는 종교 영향력에서는 개신교(53.2%), 불교(23.7%), 가톨릭(17.6%)순이고, 한국 사회발전 기여도에서는 불교(34.7%), 개신교(27.0%), 가톨릭(20.9%)이며 미래가 가장 밝은 종교를 묻는 질문에는 불교(34.5%), 가톨릭(32.5%), 개신교(26.8%)이었다.



왜 이런 비참한 결과가 나왔을까요. 다른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억울한 점도 있을 것이다. 우리 개신교는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행하기 때문에 우리의 숨은 봉사가 잘 알려지지 않기 때문에 저평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성찰해 보면 우리의 모습이 우리 자신도 모르게 율법사나 제사장 혹은 레위인을 닮아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기 의와 자기만족, 자기만의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게 무엇인가. 교회당에 나와서 은혜 받는 것도 필요하고, 위로 받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움직이는 사랑이 필요하다.



성경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명사보다는 동사로 더 많이 소개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요3:16을 보자.“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를 주시고, 행동하는 사랑이다. 요일4:9을 보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하나님의 사랑은 나타내고, 행동하는 사랑이다. 그래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지나치고, 눈감고, 모른 체 하는 사랑이 아니라,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오시고, 주시고, 나타내는 사랑이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점에서 강성기 목사님과 사랑샘공동체 회원들을 마음으로부터 존경한다. 강 목사님은 이 시대에 사람들 속에 화석처럼 굳어져가고 있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움직이는 사랑, 행동하는 사랑으로 만들기 위해 애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처럼 소외당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참된 이웃이 되기 위해 애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더 이상 감미로운 음악이 아니다. 더 이상 심금을 울리는 설교가 아니다. 더 이상 신기한 기적이 아니다. 오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예수님처럼 우리 자신이 참된 이웃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어 마음에 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사람들, 상처받고, 무너져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저는 오늘 말씀의 결론으로 이 한 말씀을 하고 마치겠다.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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